'연극'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08.04 '제가 열일곱살부터 연극을 시작했거든요.'
목표는 셰익스피어2010. 8. 4. 03:26

 운좋게도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가졌다. 내가 꽁꽁 잠가두고 있던 생각의 상자를 풀었고, 좀 더 많은 것들을 담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항상 만나던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공유하는 일은 언제나 자극적이다. 

 그 사람들 사이에선 솔직할 수 있었다. "저는 극작가가 꿈인데요..."


 어쩌면 스스로가 바보같다는 생각도 했다. 연출가에게 대본은 그저 '상황을 풀어놓는 말들' 일 뿐이고, 배우에게 대본은 '무대를 만들기 위해 연습할 때 보아야 할 종이' 일 뿐일 수 있는데. 도대체 난 뭐가 좋다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희곡을 쓰고싶어하는 것일까.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넓이도 길이도 모르는 하얀 종이를 보고 '나는 아름다운 공작새를 접을거야' 하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공작새를 연구하고, 종이를 자르고 붙이는 법을 배우고 있는데.


 술을 먹으면 나도 모르게 엄청나게 진지해지는 습관이 있다. 가끔은 너무 심각하게 진지해져서 '오글거리는' 멘트를 남발하기도 한다. 나에게 무지 엄하게 굴었던 아빠에게 '아빠, 난 아빠가 참 고마워...' 라는 말을 반복한다던지 하는 것들. 그 때 아빠의 대답은 이랬다. "그래 고맙다, 그런데 이제 그만 말하자. 너 벌써 그거 몇번째 말하는줄 아니?" 물론 나는 기억이 하얗게 없다. 주위의 목격담을 주워들어 짐작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상황은 이랬다. 연극을 하는 사람과 술을 먹었다. 와, 이렇게 좋은 기회가! 게다가 어색한 자리도 아닌 술자리다. 술 한잔 들어간 것을 핑계로 이것저것 물어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은 스르륵 풀어지기 시작했다. 맥주 두어모금과 소주 두잔에.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사람에게 나는 무언가를 주절주절 물어보았다.


 주위에서 '이러다 정분나는거 아니냐'며 놀리지 않았으면 그 오글거리는 진지한 이야기들은 계속되었을지도 모른다. 천만다행이다. 나는 취했고 그사람은 취하지 않았으니까. 다시는 그 자리에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생겼을 수도 있다. 아아아아 고맙습니다 주위에 있던 많은 분들! 덕분에 저는 '약간 취했던 것'을 핑계로 다시 그 사람과 어색한 사이가 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의 한마디가 집에 돌아온 후에도 계속 맴돌아 나를 외롭게 만든다. 그가 이성으로 보였다거나 설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의 '열정'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제가 열일곱살부터 연극을 시작했거든요...' 그 후에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시끄러워서 들리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열일곱? 열일곱이라면 내가 급식소 앞에서 '꺅 3학년 오빠들이다!'를 외치던 때가 아닌가. 얼굴에 하나둘 나는 여드름을 걱정하고, 미래라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그 순간순간이 즐거웠던 나날들. 그 시절에 이 사람은 자신의 미래로 연극을 선택했다. 그 사실이 부럽고 부끄러워서 집에 돌아와 내내 우울했다.


 '이제 대충 틀은 짜뒀으니까, 시간 많이 남았는데 뭐' 하며 미뤄왔던 셋째 너구리 실종사건 노트를 다시 꺼냈다. 술김이라 조금 어지럽지만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린다. 완벽한 희곡이 완성될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즐겁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만난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처럼. 나도 내 삶과 내가 하려는 일을 사랑하고 싶다.


 어쩌면 내 운명은 이런 것이 아닐까. 흐릿해지다가도 어느순간 왈칵 나오는 고장난 잉크펜처럼. 나도 모르게 다른 힘에 이끌려 집중하게 된다. 당분간은 계속 솔직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는 더 멋진 희곡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목표는 셰익스피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곡의 시작은 낙서  (0) 2010.08.09
꿈에서 본 연극  (0) 2010.08.07
Posted by 규루루!